실렌티움(묵시암)

실렌티움(묵시암)

실렌티움(묵시암)

〈실렌티움(묵시암)〉, 2025, 철판, 자연석

〈실렌티움(묵시암)〉, 2025, 철판, 자연석 © Lee Ufan. 사진: 김상태

이우환 작가는 1960년대 말 ‘모노하(物派)’의 이론적 형성에 깊이 관여하며 일본 동시대 미술의 전환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1960년대 말부터 한국 화단과의 교류를 이어가며 1970년대 실험미술과 단색화가 전개되는 과정에도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작업세계는 유럽 미술계에서 서구 중심의 인식 틀을 넘어선 사유와 조형적 탐구로 주목받아왔습니다.

전통정원 ‘희원’ 내에 선보이는 신작 〈실렌티움(묵시암)〉은 라틴어로 '침묵(Silentium)'을, 한국어 명칭인 〈묵시암(默視庵)〉은 '고요함 속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조용한 눈길로 만나는 공간”이라는 컨셉 아래 실내 작품 3점과 야외 설치 1점이 하나로 어우러진 프로젝트입니다.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침묵 속에서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고 관계와 만남, 울림과 호흡을 느낄 수 있는 총체적인 공간 작업을 처음으로 선보입니다.

작가는 "내 작품은 봄과 동시에 울림이 있는, 보자마자 감각이나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이나 에너지가 중요하다“며, 관람객이 "침묵 속에 머물며 세상 전체가 관계와 만남, 서로의 울림과 호흡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렌티움〉에서 색채는 작가의 예술세계에서 자연의 현상과 변화를 반영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작가는 주로 단색 계열의 작업을 해왔으나, 이번 작품에서는 색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작품 속의 ‘점’과 ‘원’에서 보여지는 색채는 가장 연한 색에서 진한 색으로 서서히 변화하는 방식으로 생명의 변화와 순환을 보여줍니다.

〈실렌티움(묵시암)〉, 2025, 아크릴 (바닥), 자갈

〈실렌티움(묵시암)〉, 2025, 아크릴 (바닥), 자갈 © Lee Ufan, 사진: 김상태

〈실렌티움〉의 입구에는 무거운 돌과 두꺼운 철판으로 이루어진 설치 작업 1점이 침묵과 사색의 공간으로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합니다. 실내로 들어서면 신작 3점이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입구 왼쪽 방의'플로어 페인팅(Floor Painting)'은 '점'이 극한의 우주, 무한까지 확장되어 이루는 '원'의 형태와 색채 변화로 생명을 표현하여,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실렌티움(묵시암)〉2025, 아크릴 (벽)

〈실렌티움(묵시암)〉2025, 아크릴 (벽) © Lee Ufan, 사진: 김상태

중간 방 '월 페인팅(Wall Painting)'의 점은 이우환 예술 세계의 출발점이자 귀환점입니다. 극도로 절제된 붓놀림을 따라 공중에 떠 있는 듯 보이며, 미세한 색채의 변화 속에서 그린 것과 그리지 않은 것이 만나 더 큰 조화를 이룹니다.

〈실렌티움(묵시암)〉2025, 자연석, 목탄

〈실렌티움(묵시암)〉2025, 자연석, 목탄 © Lee Ufan, 사진: 김상태

오른쪽 가장 안쪽에 자리한 '쉐도우 페인팅(Shadow Painting)'은 돌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작가가 그린 그림자를 함께 보여줍니다. 이는 자연과 인간의 상상력이 중첩되는 지점을 드러내며, 현실과 환영, 욕망의 관계를 돌아보게 합니다.

〈실렌티움〉에 선 이우환 작가, 2025, 호암미술관

〈실렌티움〉에 선 이우환 작가, 2025, 호암미술관, 사진: 이재안

1936년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난 이우환은 한국의 전통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 학창시절 문학과 글쓰기에 깊이 몰두하였다.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여름 일본으로 건너가 1958년부터 도쿄 니혼[日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탐닉한 하이데거(Heidegger)의 존재론, 신체성에 기초한 메를로 퐁티(Merleau-Ponty)의 현상학,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郞]의 장소론 등은 이후 작가의 미술활동에 중요한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그는 일본 ‘모노하’ 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모노하는 돌, 흙, 나무 등 자연물을 순간적으로 배열해 세계의 열린 구조를 드러내는 운동으로, 서구의 오브제 미술과 달리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사물 그 자체의 존재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는 기술 중심의 서구 근대적 인식에 대한 비판과도 맞닿아 있었다. 이우환의 미술세계는 “존재, 무, 사이, 만남”이라는 개념으로 요약되며, 인간과 자연, 사물이 맺는 관계를 탐구한다.

〈관계항〉은 이러한 철학을 시각화한 대표작으로, 돌과 철판, 유리 같은 이질적인 재료를 결합해 자연과 문명의 관계를 드러냈다. 그는 인위적인 구성을 피하고, 인간과 사물이 서로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세계의 본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1973년 이후에는 〈점으로부터〉, 〈선으로부터〉 등의 회화 연작을 통해 시간성과 행위성을 탐구했다. 점과 선의 반복은 우주의 무한성과 존재의 순환을 암시하며, 작가 자신은 최소한의 개입자로서 이러한 질서를 화면 위에 드러냈다. 1980년대에는 〈바람으로부터〉 연작을 통해 붓의 움직임이 한층 자유로워졌고, 1990년대 〈조응〉 연작에서는 여백이 강조된 절제된 화면으로 돌아왔다. 점과 선이 서로 상호 조응하며 캔버스 전체에 리듬과 존재감을 형성하여, 조각 작업 〈관계항〉과 철학적으로 맞닿아 있다.

이우환은 1970년대 일본 모노하의 이론적인 리더이자 한국미술에 중요한 자극원이 되었으며, 아시아와 유럽 미술계에 충격을 주고 두 세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탐구와 질문은 1990년대 이후 많은 평론과 논문 그리고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통해 계속해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